절정絶頂 - 조지훈 (낭송 윤정희)
나는 어느새 천길 낭떠러지에 서 있었다. 이 벼랑 끝에 구름 속에 또 그리고 하늘가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누가 피워 두었나 흐르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칠 때 튀어오르는 물방울처럼 이내 공중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꽃잎이 아니었다.
몇만 년을 울고 새운 별빛이기에 여기 한 송이 꽃으로 피단 말가 죄 지은 사람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눈가에 어리었다간 그만 불붙는 심장으로 염통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그늘을 이루듯이 이 작은 꽃잎에 이렇게도 크낙한 그늘이 있을 줄은 몰랐다.
한 점 그늘에 온 우주가 덮인다. 잠자는 우주가 나의 한 방울 핏속에 안긴다 바람도 없는 곳에 꽃잎은 바람을 일으킨다 바람을 부르는 것은 날 오라 손짓하는 것 아 여기 먼 곳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꽃나무 가지에 심장이 찔린다는 무슨 야수의 체취와도 같이 전율할 향기가 옮겨 온다.
나는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 영원을 찾는다 나는 또 철모르는 어린애도 아니었다 영원한 환상을 위하여 절정의 꽃잎에 입맞추고 길이 잠들어버릴 자유를 포기한다.
다시 산길을 내려온다 조약돌은 모두 태양을 호흡하기 위하여 비수처럼 빛나는데 내가 산길을 오를 때 쉬어가던 주막에는 옛 주인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살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이었다 울타리에 복사꽃만 구름같이 피어 있었다 청댓잎 잎새마다 새로운 피가 돌아 산새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.
문득 한 마리 흰나비! 나비! 나비! 나를 잡지 말아다오 나의 인생은 나비 날개의 가루처럼 가루와 함께 절명(絶命)하기에――아 눈물에 젖은 한 마리 흰나비는 무엇이냐 절정의 꽃잎을 가슴에 물들이고 사(邪)된 마음이 없이 죄 지은 참회에 내가 고요히 웃고 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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