낭송 향연

자화상 - 서정주 (낭송 조정숙)

眞旗 언제나 2020. 3. 10. 18:06

자화상 - 서정주 (낭송 조정숙)

자화상 - 서정주

 

애비는 종이었다.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.

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.

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....

 

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.

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

외할아버지의 숯 많은 머리털과

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.

 

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.

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.

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

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

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.

 

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

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

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

빛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

병든 수캐 마냥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.